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신흥국 프로이센은 경제적으로 발달한 산업지역인 슐레지엔을 획득함으로써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동시에 프리드리히 2세의 천재적 용병술이 부각되면서 그의 전략, 전술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는 비록 슐레지엔을 상실했으나,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계승을 인정받아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을 안전하게 지켰으며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해 전쟁의 본질적 목적인 왕위 승계를 이뤄내고 주변국들로부터 국사조칙을 인정받았으며, 해체 위기에 놓였던 제국을 재통합시켰다[* 황제로 선출된 건 프란츠 1세지만 실권자가 마리아 테레지아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제위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일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에 불과했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실제 직할령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왕국인데 이곳의 통치자는 누가 봐도 마리아 테레지아이기 때문. 어쨌든 이 영향으로 오스트리아 대공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위는 각각 계승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황제를 자처한 것은 몇 십 년이나 지난 뒤에,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황제 즉위에 자극받아서였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프리드리히 2세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대대적인 군비 증강을 시작했다. 동시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러 나라들을 발전시키면서도 본인을 배신했던 보헤미아 귀족들에 대한 뒤끝이 남았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기점으로 보헤미아는 헝가리에 비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되기까지 제국 내에서 발언권과 영향력을 점점 잃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19세기부터 [[민족주의]]가 각성해 헝가리 왕국은 [[1848년 헝가리 혁명]]으로 이탈을 시도하는 등 끊임없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한 반면 보헤미아 왕국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 등을 중심으로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내세워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호가 [[체코인|보헤미아인]]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헝가리인]]을 파트너로 선택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대타협]]과 같이 보헤미아인에게 돌아온 것은 푸대접 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그로기 상태에서 전쟁을 끝냈으나 유럽의 대표적인 강국답게 아직 체력이 남아 있었다. 특히 유럽의 전쟁과는 별개로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두 나라는 새로운 전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파르마 공국]]을 되찾아 [[카를로스 3세]]의 동생 [[필리포 1세(파르마)|펠리페 왕자]]가 파르마 공작으로 즉위하면서 남부의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을 넘어 중부 이탈리아에서까지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사르데냐 왕국]]은 비록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가 목표로 삼았던 [[밀라노]]를 손에 넣지는 못했으나 토르토나와 [[노바라]]를 얻으면서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동맹의 역전]]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유럽에 만들어 놓는다. 제7차 교육과정 [[세계사]]에서는 이 사건이 사실상의 [[최종 보스]] 역할을 한다. 다만 평가원, 교육청 문제에서는 잘 출제되지만 수능에는 잘 출제되지 않는 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